식당 앞의 메뉴판 염탐자 메모선장의 수요잡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보면 사기꾼이 자신은 돈 자체보다는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시킬 때 가격을 보지 않을 수 있는 여유를 갈구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대사를 보고 돈 없는 사람의 피로를 참 잘 포착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워낙 궁상스러운 사람이라 여러 음식점 중 하나를 골라서 들어가야 할 때 바깥에 가격표가 나와있지 않으면 절대 들어가지 못한다. 마치 들어오라는 초대를 받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뱀파이어처럼 문 밖에서 기웃거리며 벽에 걸린 메뉴판이 보이지 않을까 안쪽을 엿보곤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짓을 하고 있으면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딱히 죄를 짓는 것도 아닌데 가게 안의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까봐 먼 발치에서 눈을 찡그리고 엿보기까지 한다. 그러나 사실 가게쪽도 저렴한 가격이 장점이라고 생각하면 값을 잘 보이는 곳에 붙이든 메뉴판을 내놓든 하기 때문에 그렇게 기웃거려봤자 십중팔구 발길을 돌리게 되어 있다. 루벤스의 그림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네로같은 심정이다. 까짓거 뭐 얼마나 한다고 그걸 못 들어가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예전에 우리 가족이 6만원을 예상하고 간 대게집에서 16만원이라는 대지출을 하는 걸 목도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까짓거 뭐 얼마나 하겠어’ 라는,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아무튼 사무실이 많은 지구에서는 특히 뭘 얼마에 파는지 알아보는데 상당히 애를 먹게 된다. 젊은이들이 많은 대학가 등지와 비교하면 영 편치 않다. 대학가는 500원만 해도 상당한 경쟁력이 발생하는 곳이라 가격을 잘 보이게 해놓든지, 아니면 무턱대고 들어가도 딱히 근심스러울 가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역시 어른들은 뭔가 달라도 다른 것일까? 그렇게 보면 나도 나이에 비해 지갑이 제법 젊고 생생한 셈이다. 앞날이 창창하다.

근사한 식당일수록 가격을 알 수 없어서 가게를 코앞에 두고 인터넷을 검색하기도 한다

하루 한 끼 5000원짜리 식사를 하는 대신 좀 더 고급스럽게 6000원짜리 식사를 하면 어떨지 진지하게 계산해본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짜장 대신 볶음밥을 먹는 식이다. 한 달에 서른 끼 정도를 먹는다고 가정하면 당연히 3만원의 추가 지출이 발생한다. 일 년 내내 이 수준을 유지하면 36만원이 더 나간다. 딱히 흉악한 지출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작 그걸 아껴서 그럭저럭 목돈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돈을 모으는 것보다 알파고가 인류를 지배하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러니 식사 수준을 높여서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삶의 질을 간단히 높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월 30000원짜리 식생활 업그레이드 패키지 서비스 구독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 당장 쓸 돈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당장 엊그제만 해도 TRPG 제작 크라우드 펀딩에 약 10만원을 후원했을 정도다. 얼핏 들으면 제정신이 아닌 소리 같지만, 그렇게 문화적으로 소비할 돈을 끌어오려면 예산에서 줄일 수 있는 게 식비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런 돌려막기가 하루이틀 일도 아니다. 먼 옛날 아주 어릴 때부터 원하는 걸 갖기 위해 손쉽게 선택한 것은 식비 줄이기였다. 그때는 정말 줄일 게 전혀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좀 싼 것으로 배를 채운다고 당장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니....... 그리하여 어릴 적 예산 편성 방식이 늙도록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스무살의 예산 편성이 여든 살까지 가는 게 아닐지?

아무튼 그 결과 음식점 앞에서 기웃거리며 가격표를 염탐하는 수상한 남자가 탄생하고 만 것이다. 고담시 빌런도 아니니 딱히 자랑스럽진 않지만, 이렇게 뼛속까지 스며든 습성이 문제가 되는 순간이 있다. 당연히 타인과 식사를 할 때다. 아무리 나라도 적당한 상식과 한줌의 체면이 있으니 남들과 식사를 할 때는 가격표를 기웃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서 메뉴판을 보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아마 견실한 수입으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은 메뉴판을 보면 머릿속에 '고객님의 주문 내역과 별점 내역을 기반으로 메뉴을 추천해드립니다' 하는 배너가 뜰 것이다. 내 머릿속에도 뜨기는 한다. 하지만 난 그걸 일단 옆으로 치워놓고 메뉴를 저렴한 순으로 정렬해 본다. 그러고 있자면 이번에는 칼로리 표가 시야에 어른거린다. 그렇게 세 가지 표를 대조해가면서 먹고 싶은 것중에 비교적 증세를 덜 해도 되며 칼로리가 가혹하지 않은 메뉴를 골라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격이 저렴하며 가볍고 성능이 좋은 노트북을 고르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다. 완벽한 교집합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느 하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데, 기껏 놀러나와서 별로 먹고 싶지도 않은 걸 먹느니 안 먹는 게 나은 노릇이라 결국은 돈이나 칼로리를 포기한다. 그러면 이후에는 가혹한 증세로 위장 복지금을 삭감하거나, 운동할 여력이 없으니 밥을 대충 때우며 담배나 피울 수밖에 없다.

사실 예산을 식비에 더 투자하기만 하면 이런 궁상스러운 짓을 조금이나마 덜 할 수 있다. 사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을 즐기자고 식비를 줄인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쓸모없는 짓을 즐기자고 사는 것이 아닐까? 생존 이외의 부분을 다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인간에게 관보다 더 큰 집은 필요없는 게 아닐까?

물론 고급스러운 식사도 분명 식문화니까 이런 논리로 식비 줄이기를 합리화하다 보면 식문화 자체를 부정하기 쉽다. 흔히 ‘커피 마실 돈으로 책을 한 권 샀으면…….’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 논리도 확장하면 사람은 죽지 않을 만큼 피죽만 먹고 살아도 된다. 끔찍한 말이다. 현대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가끔씩 그럭저럭 인테리어가 괜찮은 식당에서 맛난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다.

결국 이 궁상은 내게 있어서 쓸 수 있는 돈은 한정되어 있고 식문화의 우선순위는 다른 문화 콘텐츠에 비해 낮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쓸 수 있는 돈이 좀 더 늘어나거나 우선순위가 바뀌면 가게 앞을 서성대는 짓을 그만두게 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식문화에 높은 우선 순위를 부여할 것 같진 않으니 쓸 수 있는 돈이 늘어나는 쪽이 그나마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적었듯이 이 짓을 하루이틀 한 게 아니라 거의 본능에 가까운 습성이 되었다. 고양이가 밥먹는 곳 근처에서는 물을 잘 마시지 않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설령 연금복권에 당첨된대도 비슷한 패턴이 평생 이어지지 않을까…….

그러니 식당 주인 여러분, 부디 메뉴판을 더 잘 보이게 해주시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덧글

  • 인곤君 2017/05/31 14:45 # 삭제 답글

    저는 일정한 수입이 생긴 이후, 열심히 일을 하는 대신 맛있는 것을 먹을 권한이 있다는 판단 하에 '식비 아끼기'를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취미는 취미대로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남은 잔고가 없다는 것입니다. 흑..흑..
  • 메모선장 2017/06/14 11:39 #

    식비를 아끼지 않는다는 건 참 아름답고 멋진 일입니다.... 잔고가 뭐 중요한가요
  • 함부르거 2017/05/31 16:30 # 답글

    나라에 따라서는 실외에 가격표를 반드시 비치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는 곳도 있지요. 대체로 입구 부근에 스탠드로 설치해 놓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는 종종 볼 수 있지요. 별거 아닌 거 같은 제도이지만 그런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메모선장 2017/06/14 11:40 #

    참 좋은 법이군요. 오히려 기다리는 동안 메뉴 보고 시간 아낄 수 있는 곳에서 더 가격 표시가 잘 되는 것 같습니다.
  • 감사 2017/06/01 00:16 # 삭제 답글

    좋은 수필 잘 읽고 갑니다.
  • 메모선장 2017/06/14 11:40 #

    감사합니다. :)
  • bluesky 2017/06/06 21:18 # 답글

    저도 비슷한 습성이 있는데, 오랜 자치생활에서 왔는지, 마트만 가면 그런 고민들을 많이해요.. ㅋㅋ 마트 지나갈때면, 으레.. 들러서 가격 훑어보는 "이상한" 취미랄까요...ㅎ.... 가격을 보면 이걸로 내가 몇끼를 만들수 있으며, 영양학적으로는 어떤 가성비가 나오는지.. 등등등...... ^^
  • 메모선장 2017/06/14 11:42 #

    일종의 살림 내공이군요... 그런데 물가 때문에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는 않으시겠어요 ㅠㅠ
  • bluesky 2017/06/14 21:45 # 답글

    꼭 그렇지는 않은데요.... 오히려 물건값을 여기저기 자주 보다보니까.... 횡재? 란걸 할때가 많아요ㅎㅎ.. 그리고 마트 물가는 기본적으로 외식하는 것보다는 훨씬 저렴하답니다. ㅋㅋㅋ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