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장은 내가 가지고 놀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앗, 주인님, 그, 그만해주세요..."
"여기까지 와서 그만 둘 수 없잖아? 후후, 이걸 봐 스크롤바가 이렇게나...!"
"아아앗! 그렇게 거칠게 휠을 굴리시면...!"
"입으로는 그만해달라고 떠들지만 여긴 솔직하군, 후후, 오늘밤은 각오하는 게 좋아. 키보드가 질척질척해질 때까지 해주겠어."
"아아아아아아아!"
메모장은 섬세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메모장은 다른 녀석들과 달리 작고 연약하며 섬세하고 수수했다. 자기를 화려하게 꾸밀 줄도 모르면서 어디서나 부르기만 하면 나타나 미끈미끈한 텍스트를 한없이 받기도 하고 다시 쏟아놓기도 했다. 전화선으로 통신을 하던 시절에는 무수한 사랑을 받았지만 이제는 기껏 시리얼 따위를 적어놓는 포스트잇이나 문서를 조합하기 전의 테이블처럼 쓰이거나, 고작 불법 소설을 읽는 처지였다. 그래도 아직까지 불평 한번 하지 않고 묵묵히 일했다. 게다가 다른 녀석들이 버젼 업이다 뭐다 시끄럽게 생색을 낼 때도 가만히 곁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성실함이 대견했지만 아주 가끔씩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답답했다.
가련한 메모장에게 더러운 텍스트를 쏟아내던 나는 가혹하게 F5를 눌렀다.
"지금이 몇신지 말해봐."
"아아...오후 9:13 2008-10-06 입니다."
"다시 한번 말해봐!"
"으윽.. 오후 9:13 2008-10-06 입니다..."
"계속해!"
"하..하아.. 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3 2008-10-06오후 9:14 2008-10-06오후 9:14 2008-10-06오후 9:14 2008-10-06오후 9:14 2008-10-06오후 9:14 2008-10-06오후 9:14 2008-10-06오후 9:14 2008-10-06오후 9:14 2008-10-06오후 9:14 2008-10-06오후 9:14 2008-10-06오후 9:14 2008-10-06오후 9:14 2008-10-06오후 9:14 2008-10-06오후 9:14 2008-10-06.."
"혼자 시간을 말하면서도 스크롤바가 이렇게나 민감하게 반응하다니, 정말 몹쓸 아이로구나."
내가 꾸짖자 메모장은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됐어. 오늘은 더 못쓰겠군. 돌아가 봐."
"알겠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간 버튼을 찔러 메모장을 돌려보내기 전 나는 무심하게 스크롤바를 쥐고 위로 쓸어올렸다. 메모장은 허리를 뒤로 꺾으며 숨을 들이쉬었다.
"하아.. 이, 이렇게나 가득......"
메모장의 하얀 몸은 나의 텍스트를 너무 많이 받은 나머지 반쯤 검게 변해있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빨간 버튼을 찔렀다. 그러자 메모장은 피아노처럼 청명한 소리를 내며 변경된 내용을 저장하겠느냐고 물었다. 필요없다고 하니 메모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잊어버리는 게 녀석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메모장은 슬퍼한 적이 없었다. 남겨야 할 것이 사라져도 묵묵히 나타났다. 원래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매번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나타나는 메모장을 몇번이나 불러들일지 알 수 없는 밤이다.
의문의 소년님이 누군가 메모장을 의인화해달라고 하셨기에 좋은 소재다 싶어 써봤는데, 보시는 바와 같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질척질척하게 더럽혀진 글이 되었습니다. 저의 텍스트적 도덕 의식이란 고작 이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하이텔 시절에는 메모장이 가벼워서 주요 워드프로세서로 쓰였는데 말이죠. 그래도 앞으로도 꾸준히 윈도우즈 집안에서 일해줄 것을 생각하면 대견스럽습니다.
끝으로 메모장의 성별은 취향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야밤에 워드 작업하는 이야기이므로 19금은 아닙니다.



덧글
제이포나인 2008/10/06 22:27 # 답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5를 누르면 현재시각이 나오는구나 이렇게 멋진 기능이 있는지 몰랐어 메모짱@ㅁ@!!
메모선장 2008/10/08 09:08 #
나도 쓰면서 처음 알았음..;1
디굴디굴 2008/10/07 01:09 # 답글
저도 처음 알았네요... 앗 근데 무심결에 F5 를 쓴다는 게 F5 를 눌러서 새로 고침이...
메모선장 2008/10/08 09:08 #
저도 쓰면서 처음 알았습니다;2
MCtheMad 2008/10/07 01:38 # 답글
메모장과 메모선장이 한글자 차이라 무쟈게 신경쓰여.그리고 "혼자 시간을 말하면서도.." 부분에서 쓰러졌음
메모선장 2008/10/08 09:08 #
다이얼로그로 메모선장, 메모장 번갈아가면서 쓰려다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그만뒀습니다. 그리고 그부분이 포인트죠;
謎の少年 2008/10/07 05:10 # 답글
먼저 "메모선장님, 감사합니다!!!!"제 소망이 이렇게 멋지게 표현될 줄은 몰랐어요. (붉그레)
당분간 메모장 사용하면서 항가항가 하는 일이 많을 듯 하여요.
메모선장 2008/10/08 09:09 #
의외로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좀더 순수한 쪽을 바라실 줄 알았거든요;
격이 2008/10/07 15:01 # 답글
아놔... 뒤집어졌습니다 -_ㅠ
메모선장 2008/10/08 09:09 #
감사합니다. 근데 좀 민망하군요;
규현 2008/10/07 23:22 # 답글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이거 어떡해요 ㅠㅠㅠㅠㅠ 이렇게 허리 끊어져라 웃으면 안되는데 ㅠㅠㅠㅠㅠ F5를 누르면 시간이 나오는군요. 저도 처음 알았어요 (3)
메모선장 2008/10/08 09:09 #
나도 처음알았다;3. 암튼 생각보다 웃긴모양이라 다행..
착선 2008/10/11 10:54 # 답글
이쪽 계열로 소질이 대단하신듯...
김성일 2008/10/11 10:56 # 답글
어째서 키보드는 질척해진 걸까요
miyake 2008/10/11 10:57 # 답글
어머나.... 재밌었어요 우하하핫
icemint 2008/10/11 11:22 # 답글
읽다말고 메모장양을 불러 F5를 눌러보았습니다. 역시나 반응이 좋은 아이더군요
남극탐험 2008/10/11 12:23 # 답글
이거...옛날옛적 눈을 거쳐간 게임의 대사들이 떠오르는데요...ㅎ
날개 2008/10/11 12:32 # 답글
헐;; 이 글 무서운데요?
폐묘 2008/10/11 13:09 # 답글
제가 일할 때 주로 메모장을 애용하는데 이거 너무 마음에 드는 글이군요[..]F5키를 누르면 저런게 나오는지 몰랐었네요. ㅋㅋ
제절초 2008/10/11 13:39 # 답글
너무 멋지십니다-ㅂ-b 전 요새 워드패드를 더 많이 쓰긴 하지만... 익플쨩이라던가 탐색기군 같은것도 나오면 시리즈가 될지도!?
몽몽이 2008/10/11 13:45 # 삭제 답글
하하ㅋ 잘 보았습니다.그런데 키보드의 심정은 어땠을런지요? ㅎㅇㅎㅇ
혈견화 2008/10/11 15:04 # 답글
우왕 굳 ㅋㅋ
스페이드A 2008/10/11 15:05 # 답글
아아...이건 ;
세이밥 2008/10/11 15:34 # 답글
헐...도저히 못보고 스크롤을 내렸습니다 oTL
마지막천사 2008/10/11 15:48 # 답글
이건 좀...19금은 아니지만 서도 은근히 19금에 버금가는...
ercast 2008/10/11 16:08 # 답글
.................강하다 이렇게나 관능적이라니;;
사헤라 2008/10/11 17:55 # 답글
메모장의 성별은 취향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게 더 관심이 가네요..........ㅠㅠ*
키세츠 2008/10/11 18:29 # 답글
다음엔 워드패드 의인화 부탁드려도 될까요. 푸하하하하~!
daewonyoon 2008/10/11 21:39 # 답글
재밌네요.
깐죽깐돌이 2008/10/11 22:21 # 답글
와우, 재밌네요
자그니 2008/10/12 00:07 # 답글
그럼 저는 윈도 칼렌더 의인화...;;;;;; 아, 아니, 휴지통이 더 좋을까요...(응?)
월광토끼 2008/10/12 00:16 # 답글
...엄청 관능적이군요. 왠지 좀 더 숨을 거칠게 쉬고 있는 중입니다.
N___G 2008/10/12 00:18 # 답글
이럴수가.. 지나가다 감동받고갑니다.. 다음번엔 그림판 버젼도 보고싶네요
달로스 2008/10/12 07:56 # 답글
가...강합니다;
연휘煉暉 2008/10/12 13:18 # 답글
끝으로 메모장의 성별은 취향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보고 쓰러졌습니다.
저도 도중에 휠을 내려버린;; 이게 19금이 아닌건가요ㅠ<
링크신고하고 갑니다.
neunga 2008/10/12 15:03 # 답글
아. 이런 궁극의 성인애로티즘!
아야 2008/10/13 10:19 # 삭제 답글
으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메모선장님 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침부터 일하는데 원격감시당하고있는 카운터 컴퓨터로 매우 웃으면서 봤더랍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근데 사장님이 보셨으면 어쩌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음은 휴지통의인화는안될까요[엉?]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잘봤습니다 ;ㅁ;!!!!
듀나스 2008/10/14 15:05 # 답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나가다가 도저히 댓글 남겨야 할것 같아서 남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모장 의인화 정말 잘쓰셨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