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 투어는 잔혹한 여행의 여왕 (3)

4.얘기하긴 힘들고 듣기 싫은 말은 많이 듣는다.

사실, 부모님이 전에 간 투어에는 젊은이들이 많았다기에, 그래도 몇 마디 잡담할 사람 두어 명은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아니더군요. 방학 시즌도 아니라 그런지 정말 청년층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 다음으로 어린 사람이 장년층으로 넘어가는 나이였고, 그래서 전 정말 TV프로그램에 나오던 ‘혼자 어린 인솔자’ 비스무리한 기분을 맛봐야 했습니다.

물론 진짜 인솔자는 따로 있으니까, 직접 안내하고 식사할 자리를 예약하는 등 진짜 노동을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냥 낫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가이드가 없는 자리에서 모자란 영어로 통역을 하거나 핸드폰 설정을 도와야 했다는 건 둘째치고, 무엇보다 도통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상대가 없었다는 겁니다. 대화가 원만하게 진행되려면 문화적 배경이 비슷해야 하죠. 그리고 한국처럼 취미가 삭막한 나라에서 문화적 배경의 형성에는 나이가 가장 큰 역할을 할 겁니다. 무슨 동호회 모임에서 간 투어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나이가 비슷한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되겠어요.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얘기하고, 전 그 옆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효도하는 아들 얼굴로 웃고 있거나 핸드폰을 볼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다 가끔 화제가 튀긴 하더군요. 뻔한 방식으로 말이죠. 나이, 직업, 배우자 유무, 애인 유무… 이런 호구조사부터 하고 상황에 맞는 잔소리를 하는 겁니다. 덕분에 좋은 여자 만나서 빨리 결혼하라는 얘기를 꽤 많이 들었습니다. ‘명절 in 유럽’이더군요. 다른 대화가 이루어질 법한 상황이 아니니까 그렇게 된다는 건 이해하겠지만, 그렇게 이해한다고 딱히 기분이 덜 나쁜 건 아닙니다. 할 말이 없으면 그냥 말을 걸지 않으면 좋을 텐데 말이죠.



스페인 광장의 마차. 듣기 싫은 말과는 별 관련 없지만 아무튼 이건 꼭 탈만합니다.



그리하여 전 틈틈이 사진 관련 일을 하느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진 찍기에 열중, 혹은 열중하는 척 해야 했는데, 그것도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5.사진은 여행을 지배한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라는 카메라 선전 문구가 있었죠. 굉장히 잘만든, 멋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 말이 맞기도 하구요. 그만큼 기록은 중요한 겁니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죠. 남는 건 사진 뿐이라고 하잖아요. 좋은 곳에 갔으면 좋은 사진을 많이 찍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가 적당히 많은 걸까요? 어차피 적당히 추려내면 되니까 많을수록 좋을지도 모릅니다. 디지털 카메라는 아무리 찍어대도 돈이 드는 게 아니잖아요.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전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대는 것도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사진을 찍으려면 카메라를 가져가야 하죠. 스마트폰으로 찍는다면 더 챙겨봤자 셀카봉 정도니까 괜찮지만, 정말 ‘카메라’를 쓴다면 이것을 운반하는 데 노동력이 들어갑니다. 전 기왕 가는 김에 화질 좋은 사진을 남기자고 형의 DSLR을 빌려갔는데,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는 장비를 항상 갖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성가신 일이더군요. 목에 오래 걸고 있으면 목이 뻐근하고 어깨에 걸고 다니면 반드시 어딘가에 부딪치기 마련이라 대체로 손에 들고 다녀야 했으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기본 장비가 많기도 했어요. 스마트폰으로 위치 정보와 텍스트 기록을 남겨야 했고, 자꾸 먹통이 되는 로밍 에그를 자꾸 리부팅 해줘야 했으며, 거기에 여행사에서 빌려준 무선 수신기를 목에 걸고 이어폰을 귀에 낀 채로 설명을 듣는 동시에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대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카메라를 번거롭게 가져갔으니 당연히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비교적 자제해서 1500장 나오더군요. 요는 그 많은 사진을 찍는 내내 저는 그 멋진 풍경을 눈이 아니라 조그만 뷰파인더로 봤다는 뜻입니다. 360도 끝내주는 광경을 어떻게 잘라낼까 궁리한 시간이 얼마나 길었을지는 계산도 못하겠군요. 사진을 무한정 찍을 수 있는 만큼 눈에 보이는 것을 즐기는 대신 사진 찍을 궁리를 하는 시간도 무한정 늘어난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세상에 내가 찍은 사진보다 훨씬 멋있게 찍은 사진이 얼마든지 많을 텐데 나까지 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풍경을 찍어봤자, 혹은 매번 똑같은 포즈로 내가 보고 싶은 방향의 반대 방향에 있는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사진 찍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말이죠. 물론 이건 지나치게 허무주의적인 생각이긴 합니다만.

아무튼 어지간하면 보정도 하고 추려내서 자랑도 할 텐데, 볼 사진이 1000장을 넘어버리니 정리도 귀찮아서 시차 때문에 어긋난 날짜 정보만 고치고 처박아버렸습니다. 딱히 다시 꺼내보면서 아, 여긴 정말 좋았지, 하고 감상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진은 대체 왜 찍었던 걸까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진은 중요한 것이고, 여행지에서 사진 찍는 행위를 야만적이라고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투어를 하는 동안 사진과 여행의 중요도가 뒤바뀌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여행에서 찍는 사진은 즐겁고 경이로운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구경도 하고 감상도 하고 그런 다음에 '멋있으니까 사진을 찍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일단 도착했으니 사진을 찍고, 사진 찍게 저기도 가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이건 ‘보수를 받는 사람’이 하는 여행 방식입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걸어다닌 것, 그리고 사진 찍은 것을 빼고 나면 도무지 경험이라고 남은 게 거의 없으니까요. 하다못해 옛날에는 삼각대 없이 동행이 같이 사진에 나오려면 누군가에게 부탁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관광객이나 행인에게 말을 걸어야 했고, 그런 기억이 재미로 남곤 했죠. 하지만 지금은 셀카봉이 있어서 모조리 자체 해결합니다. 뭐랄까, 최후의 보루 같은 게 무너진 느낌입니다.

톨레도의 아름다운 광경. 물론 이 사진도 높은 곳에 10분 정차했을 때 찍은 것.

물론 이것도 전부 패키지 투어의 목적이 '가성비를 최대화해서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곳을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진을 많이 찍는 사람이라도 일반적인 여행에서는 앉아서 차든 맥주든 한 잔 마시면서 숨돌릴 시간을 갖기 마련인데, 고작 30~45분 자유시간에서 15분 화장실 갔다오면 대체 뭘 할 수 있겠어요?



마무리.

불평을 하자면 한없이 더 할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구체적인 투어 비난이 될 것 같으니 그만 정리하죠. 요는 열흘 넘게 유럽 구경을 했지만 그것은 구경과 촬영일 뿐 여행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적어도 제 기준에선 말이죠. 하다못해 하루 세 끼가 부족할 식사마저도 현지 식단은 3분의 1도 되지 않았고 한식, 중식, 호텔식으로 때웠으니 말 다했죠. (남프랑스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요리점에 가는게 말이 되는지…?)

물론 즐길 만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좋은 설명을 들으며 안전하게 여러 곳을 본 것도 사실이고, 나중에는 어른들 농담에도 적당히 페이스를 맞출 수 있었으니까요. 정리해서 패키지 투어를 갈 거라면 죽이 잘 맞는 친구들과 최대한 여유 있는 일정으로 좋은 버스를 타는 상품을 고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수학여행 가는 기분은 맛볼 수 있을 거고, 더 잘하면 투어 속에서도 여행하는 시간을 발견할 수도 있을지도 몰라요.

저는 어떻냐구요? 글쎄요, 패키지 투어를 하기에 저는 체력적으로(특히 엉덩이와 방광이) 너무 늙었고, 정신적으로 너무 어린 것 같습니다. 또 한다면 체력적으로 다시 젊어지거나 정신적으로 더 늙은 다음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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