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에선 고딕체, 종이에선 명조체인 것은?


가독성이란 급진적인 개념일까, 보수적인 개념일까? 가독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시기에는 급진적이었겠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낡고 보수적인 개념이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전자기기 화면으로 보는 텍스트는 대체로 고딕체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에 딱히 신경쓰지 않고 큰 위화감이나 불편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가독성이란 종이 매체에 집착하는 고전적 독서가들이 공유하는 가치가 아닐까?

그러나 '책 읽는 맛'에서는 종이책을 선호하는 나 역시 당장 이 글을 고딕체로 쓰고 있고, 다른 블로그나 인터넷 기사가 고딕체라고 분통을 터뜨리지도 않는다. 어쩌면 서체에 따른 가독성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익숙한 서체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만화는 명조체에 장평을 줄여서 날씬하게 만든 것이 가장 좋다. 딱히 과학적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옛날에 많이 읽던 만화들이 그런 서체를 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만화들이 정사각에 가까운 서체를 쓰면 어딘지 모르게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영어를 읽다가 중국어를 볼 때 느낄 법한 갑갑함이다. 아무튼 말풍선에 들어가는 글자는 얄쌍한 게 좋다.

한편 잡지에 들어가는 글자는 어쩐지 명조체든 고딕체든 별로 상관없는 것 같다. 칼럼처럼 호흡이 긴 글은 명조체로 써줬으면 하고, 실제로도 많은 잡지가 그렇게 편집하는 것 같지만 칼럼에 고딕체를 썼다고 페이지를 넘겨버리진 않는다.

게임 카드 같은 데 들어가는 텍스트는 어느쪽도 나쁘진 않지만 고딕체가 낫고 익숙하다는 기분이 든다. 게임 카드에 넣는 텍스트가 명조 계통이면 글귀의 무게가 어쩐지 무겁게 느껴진다. "카드 1장을 뽑는다" 정도는 가볍게 읽을 수 있어야지, "펜은 칼보다 무겁다" 처럼 묵직한 마음으로 읽으면 심리적으로 좀 지치는 감이 있다.
사실 아는 사람만 아는 얘기겠지만 이것은 아마 매직 더 개더링을 5판부터 시작한 탓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소설만큼은 절대적으로, 반드시 명조체여야 한다. 이것은 결코 양보하고 싶지 않다. 고딕체로 써놓은 소설을 읽으라는 것은 라면을 포크로 먹으라는 것처럼 끔찍하고 잔혹한 일이다. 결코 불가능한 짓은 아니지만 도무지 이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는 뜻이다. 아이북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한국 책에 명조체를 적용할 수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탈옥을 감행하기도 했다. 모 전자책 서점이 대성하게 된 것은 전자책을 깔끔하게 만들고 독자들에게 명조체를 돌려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요즘이야 대부분의 전자책 서점이 서체 변경을 지원하게 되어 전자책 읽는 맛도 썩 나쁘지 않지만, 초창기에는 전자책따위 누가 읽을까 싶을 정도로 고역이었다.

그나저나 나는 전자책을 열었다 하면 반드시 설정을 나눔 명조나 코펍 바탕으로 바꾸는데, 글을 쓸 때는 코펍 바탕이 가장 나은 한편 읽을 때는 나눔 명조가 약간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이것도 코펍 바탕으로 인쇄된 종이책을 별로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사실 서체 때문에 구시렁대며 눈을 비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세상에는 텍스트를 다루는 생산자 일을 하면서도 그런 것에 눈꼽만큼도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최근에 크라우드 펀딩으로 산 잡지와 티알피지 룰북 두 권이 시원스러울 정도로 가독성을 무시해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룰북은 서체 자체는 괜찮았지만 줄간격이 좁아서 좀 답답했고, 잡지는 부제목에 쓸 서체와 본문에 쓸 서체를 반대로 써서 읽는 내내 눈에서 진땀이 날 것 같았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이래서야 도무지 읽고 싶지 않다.

이것은 아마추어니까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겠는데, 프로라고 꼭 이런 사항에 민감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몇몇 웹소설 사이트는 기본을 고딕으로 해놓고 변경할 옵션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글자 크기나 배경색은 조절할 수 있어서 이중으로 화가 날 지경이다. 어쩌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기술적 문제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고, 사용자 경험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영리적으로 유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가 아는 한 이런 것을 세심하게 신경써서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웹소설 사이트는 원래 종이책 만들던 민음사에서 만든 브릿지가 유일하다.

이렇다보니 인터넷을 쓰면 쓸수록 명조체니 고딕체니 굳이 따지는 것은 어쩌면 나뿐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명조체 따위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런 현상에 대해서 살짝 가설을 세워봤는데, 그것은 바로 가볍게 즐기는 스낵컬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명조체는 꺾이는 부분이 글자마다 특징을 주어 구분하기 쉽기 때문에 호흡이 긴 글에 쓰고, 고딕체는 직선적이고 각지고 커 보여 명시성이 강하기 때문에 호흡이 짧은 글에 쓰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호흡이 긴 글이 줄어들고 있으니 명조체가 줄어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탓에 명조체만 보면 궁서체를 보는 것처럼 무겁고 답답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면, 고딕체가 서체의 기본으로 자리잡는 것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오래지 않아서 종이 소설책도 고딕체로 나올지 모른다. 명조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몹시 안타깝고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리 취향이 다변화되더라도 시장 논리에 의해 소수의 취향은 무시되는 세상이다. 20년쯤 뒤에는 고딕체로 나온 소설을 타이핑해서 불법적으로 명조체본을 만든 뒤 돌려보는 불온서체모임이 생길 수도 있다. 아마 안 생기겠지만, 생기면 나도 금방 유혹당하겠지. 아무튼 정말로 명조체란 서체적으로 소수성을 갖게 된 것일까? 웹소설 사이트에선 왜 명조체 옵션을 추가하지 않는 것일까? 이 의문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



후기

최근에 종이책으로도 나온 제 소설 “심야마장”은 다행히도 명조체로 인쇄되었습니다. 안심하시고 구입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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